CEO 인사이트 · 머니투데이 기고 · 2026.10.15
AI가 엄청나게 도와주는데 왜 맨날 퇴근이 늦을까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IBM PC 시대가 열렸다. 지금 스마트폰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능이지만, 워드프로세서 덕분에 생각 없이 글을 시작하고 지우는 재미에 빠졌고, 연달아 등장한 스프레드시트는 가히 업계를 강타한 혁신이었다. 그렇게 내 업무 생산성도 눈부시게 향상되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일이란 게 끝맺음이 없다. 그래도 그땐 야근일 망정 퇴근이라는 분명한 선은 있었다. PC를 들고 다니진 않았으니까.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지금은 어떨까. 시킨 대로 일을 알아서 해주는 에이전트가 내 곁에 있지만, 내가 일하는 시간은 끊이질 않는다. 엄청나게 똑똑한 AI와 손을 잡았는데, 내가 짊어진 업무는 한도 끝도 없다.
AI 직원 두고도 업무량이 느는 이유
올해 앞다투어 쏟아져 나온 프론티어 AI 모델들의 가격 대비 성능은 크게 좋아졌다. 하지만 기업이 지출하는 토큰 비용은 줄어들지 않는다. AI가 전보다 복잡한 업무를 다루고, 개별 작업을 해치우는 속도는 빨라졌다. 그만큼 눈높이가 높아졌고 거기에 맞추려면 일은 는다. 새 길이 뚫려 퇴근길 정체가 풀릴 줄 알았더니, 차들이 쏟아져 들어와 더 막히는 꼴이다.
실제로 UC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 연구진이 흥미로운 조사를 내놨다. IT 기업 직원 200명을 8개월간 지켜봤더니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관찰 대상자들은 지시받지 않은 영역까지 손을 뻗치며 1인 다역을 자처했고, 그만큼 오랜 시간 일에 매달렸다.
동료의 몫이었거나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일까지 떠안으면서 본래의 업무 영역이 흐트러졌다. AI와 에이전트가 24시간 내내 연결되다 보니 실시간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에 쫓겨 온전한 쉼을 잃었다. 여러 에이전트를 한꺼번에 굴리면서 프롬프트를 넣고, 코드를 검토하고, 오류를 잡아내며 매 순간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피로를 누적했다.
필자는 현재 AI 기반의 교육 SaaS 사업을 하고 있다. AI의 가성비가 좋아진 흐름은 반길 일이지만, 값싸진 것은 AI의 시간이지 내 시간이 아니다. 아껴낸 시간은 통장의 돈처럼 쌓이지 않고 다음 일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시스템을 만들고 굴리기 위해 어제 맡겨둔 작업 결과를 챙기며 하루를 열고, 잠들기 직전 에이전트에 새 일감을 걸어두는 게 일상이 되었다.
휴식까지 챙겨주는 AI의 속사정
그래서일까. 요즘 AI는 일을 거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쉼까지 챙겨주겠다고 나선다. 리클레임(Reclaim.ai) 같은 AI 캘린더는 회의가 몰린 날이면 회의 사이사이에 숨 돌릴 틈을 끼워 넣고, 점심시간이 다른 일정에 밀려나지 않도록 지켜준다. 마이크로소프트 팀즈에는 '가상 퇴근(Virtual Commute)'이라는 기능이 있다. 정해둔 시간이 되면 하루를 마무리하라는 알림을 띄우고, 내일 일정과 남은 할 일을 훑게 한 뒤 명상으로 안내한다. 일감을 물어오는 것도 AI요, 이제 그만 쉬라고 등을 떠미는 것도 AI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 친절의 속을 들여다보면 묘한 구석이 있다. 회의 뒤에 끼워 넣은 휴식은 다음 회의를 위한 재충전이다. 점심을 지켜주는 이유는 오후의 집중력 때문이다. 가상 퇴근도 결국 내일 할 일을 정리하는 데서 시작한다. 리클레임의 소개 페이지에는 '번아웃 56% 감소', '주당 초과근무 4.5시간 감소' 같은 숫자가 나란히 걸려 있다. 또 숫자의 압박이다. 쉼은 일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표의 한 칸이자 성과로 증명해야 하는 관리 항목이 되었다.
손목 위의 스마트워치는 밤새 잘 잤는지 수면 점수를 매기고, 명상 앱은 며칠 연속으로 마음을 다스렸는지 세어준다. 잘 쉬었는지마저 점수로 확인받아야 안심이 된다. 휴식이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측정되는 순간, 그것은 다시 생산성의 언어로 번역된다. 쉬는 것조차 잘 해내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된 것이다.
출구 없는 뫼비우스의 띠
종이띠를 한 번 비틀어 양 끝을 붙이면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 안쪽 면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바깥 면 위에 서 있다. 안과 밖의 경계가 없으니 빠져나갈 출구도 없다. AI 시대의 일과 삶이 꼭 그렇다. 일에 지친 나를 AI가 쉬게 하고, 쉬고 난 나에게 그 AI가 다시 일을 건넨다. 일을 돕던 도구가 쉼을 관리하고, 쉼을 관리하는 도구는 결국 다음 일을 위해 존재한다. 쉼을 향해 걸어도 같은 면 위를 맴돌 뿐이다.
필자 역시 이 띠를 따라 걷고 있다. AI로 문제해결 역량을 키우자고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정작 내 하루는 AI가 정리해준 할 일 목록으로 시작해 AI에 걸어둔 일감으로 끝난다. 모처럼 쉬는 날에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에이전트가 밤사이 무엇을 해놓았을지 궁금해진다. 기술이 나를 붙잡는 것인지, 내가 기술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더 잘 쉴까'가 아니라 '쉼은 왜 늘 무언가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일지 모른다. 측정되지도, 기록되지도, 내일을 준비하지도 않는 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시간은 AI가 대신 만들어줄 수 없다. 처음부터 AI의 문법 바깥에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도 캘린더 어딘가에는 AI가 잡아준 휴식 한 칸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 칸에 들어앉은 나는 쉬고 있는 것일까.
김현숙 대표는…
㈜안랩 창립멤버로서 안랩 내 주요 사업 책임을 거쳐 소셜벤처 ㈜맘이랜서를 설립했다. 현재는 AI를 통한 문제해결 역량 학습 플랫폼 ‘맘잡고GX’ 솔루션으로 AI 문제해결 역량 훈련과 인재 매칭 서비스를 하고 있다.
머니투데이 기고(2026.10.15)를 옮겨 왔습니다. 원문 보기